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안니스 1세 (문단 편집) === 즉위 과정 === 963년, 요안니스는 상관이자 외삼촌인 [[니키포로스 2세]]를 추대해 황제 즉위를 이끌어냈다. 그는 니키포로스 2세 치하에서 사라센과 싸워 숱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니키포로스는 명성이 날로 높아지는 그를 경계해 965년 말에 꼬투리를 잡아 그를 해임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테오파노(10세기)|테오파노]] 황후가 처벌이 너무 과하다고 설득하자, 아내에게 약했던 니키포로스는 그 말에 따라 요안니스를 용서했다. 다만 칼케돈에 있는 그의 집에만 머물고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는 별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테오파노 황후가 요안니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요안니스는 몰래 황궁의 외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테오파노 황후와 만나 정을 나누다가 황제한테 불륜을 들킬것을 우려해서 마침내 황제를 암살하자는 음모를 꾸몄다. 969년 12월 11일, 요안니스는 수십 명의 음모가들을 이끌고 황후의 협력에 힘입어 니키포로스가 머물던 부콜레온 요새에 침입해 황제의 침실에 난입했다. 그 후 그와 수십 명의 음모가들은 니키포로스 2세를 잔혹하게 짓밟고 칼로 난자해 살해했다. 요안니스는 음모를 성공한 뒤 테오파노 황후와 결혼해 새 황제가 되려고 했지만 폴리에욱투스 총대주교가 막아섰다. 총대주교는 테오파노 황후를 먼 곳으로 보내고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에 오지 못하도록 해야만 요안니스의 대관식을 치를 수 있다고 못박았다. 사실 요안니스는 테오파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를 단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다. 그는 총대주교의 요구에 승낙하고 황후를 황실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되던 마르마라 해의 프로티 섬으로 추방했다. [* 테오파노는 몇 개월 후 프로티 섬에서 탈출해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시종장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서 더 먼 아르메니아의 유배지로 보냈다. 다만 요안니스를 마지막으로 보게 해달라는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여줬다. 요안니스는 테오파노와 만나는 데 동의했지만, 그 때문에 테오파노에게 온갖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다. 테오파노는 그후 바실리오스에게 화살을 돌려 그를 몇차례 때린 후 수행원들의 제지를 받아 끌려 나갔다. 이후 그녀는 아르메니아의 유배지로 보내졌고 976년에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이후에 풀려난다.] 하지만 총대주교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요안니스에게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전임 황제 암살에 연루된 공범자들을 모두 기소하라고 요구했으며 니키포로스 황제의 교회를 억압하는 모든 법령을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요안니스는 이 모든 조건을 선뜻 수락하고 969년 크리스마스에 대관식을 치르고 [[로마노스 2세]]의 아들 [[바실리오스 2세]]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한편, 니키포로스 2세의 동생 [[레온 포카스]]는 형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역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 맏아들 니키포로스와 함께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체포되어 곧 신분과 관직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레스보스로 유배되었다. 레온 포카스의 둘째 아들 [[바르다스 포카스]]는 흑해 연안의 오지인 폰투스의 아마세이아로 보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